아픈 천국/ 이영광
표제시
아픈 천국
101동과 103동 사이 탄환처럼 새들이 빠져나간 자취가 몇가닥 활로 같다.
세들어 사는 자의 까칠한 눈으로, 나는 내가 먼 빛의 명멸을 봤다는 생각이 든다. 쨍한 무심결의 일순, 아연실색할 악착이 유리 같은 불안이 심중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깃털처럼 파란이 남아 아물대는 허공.
눈 그친 뒷산 잡목숲이 생가지 분지르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고
놀던 아이가 별안간 넘어져 크게 울고, 젊은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기도 한다. 다친 몸을 더 다친 마음이 새파랗게 여미어 안고 간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모르는 땅
고통과 위무가 오랜 친인척관계라는 곤한 사실이야말로 이생의 전재산이리라. 무릎 끓고 피 닦아주던 젖은 손 울던 손.
사색이란 진실된 것이다. 아픈 어미가 그러했듯 내 가슴에도 창백한 그 화석 다발이 괴어 있어, 오그라들고 까무러치면서도 한 잎 두 잎 쉼없이 꺼내써 마침내 두려움 없는 한 장만을 남길 것이다.
이 골짜기에는 돌여이었을 건축들 위로 출렁이는 구름 전함들이 은빛 닻을 부리고 한 호흡 고른다. 깨뜨리고 싶은 열투성이 의식불명을 짚고 일어나 멀고 높은 곳에 불현듯 마음을 걸어두는 오후.
저 허공은 한번쯤 폭발하거나 크게 부서지기 위해 언 몸 가득 다시 청색의 피톨들을 끌어모으는 중이지만, 전운이란 끝내는 피할 수 없는 것, 다만 무성한 속절의 나날에 대하여 나는
괴로워했으므로 다 나았다,라고 말할 순 없을까.
살 것도 못 살 것도 같은 통증의 세계관 가지고 저 팽팽한 창밖 걸어가면 닿을까, 닿을 것이다,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환청처럼 야위는 하늘의 먼 빛.
가시숲에 긁히며 돌아오는 지친 새들도, 아까징끼 바르고 다시 놀러나온 아이도, 장기휴직중인 104동의 나도 사실은 실전의 정예들
목숨 하나 달랑 들고 참전중이었으니.
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이었으니.
기억하고 싶은 시
기우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제주도 보리밥에 깜짝 놀란
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
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
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
산지기 같은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노려밨지요
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에
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거닐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간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
*제주도의 관광지. 비자나무숲.
시인의 말
모르면, 헛소리가 새어나오던 몸.
앎이 암이랴만,
아직 내게 배달되지 않는 나의 비밀들
터지지 않은 뇌리의 폭탄들
좀처럼 끝장나지 않는 내일들에 의해
종교적으로 , 나는 산다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아니,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잊지 않은
광신도처럼.
뜨겁고 고요한 대낮을 지나
전쟁 같은 헛소리의 세계로.
2010년 8월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