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스 글릭의 '애도'내가 읽은 시 2020. 10. 14. 11:42728x90
애도 /루이스 글릭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연습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박자나 화음은 맞지 않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기 시작하면,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전통 의식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볕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의 친구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운 좋은 삶'의 의미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
* 2020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미국의 노시인 루이스 글릭이다.
상은 막 지명이 되었을 땐 좀 쑥스럽긴 하지만 대부분 오랫동안 고독하게 지낸 자신의
시간을 격려받을 수 있어 기쁜 것이다.
루이스 글릭의 '애도'라는 시가 류시화 시인이 정리한 시 모음집 ≪시로 납치하다≫에 있다기에
찾아보았다. 142~143쪽에 수록돼있다. 다시 읽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말과 글이 다른 멀리 있는 독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이 그를 세계의 시인으로 부른 것 같다.
'운 좋은 삶'이란 지금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 이 말을 전해들을 수 있다면
없던 용기도 조금 생길 것 같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과연 그럴까 싶다가도
살아있어야 곁에 있는 이들과 인사도 나누고, 자연의 바람을 스쳐 보내며 오늘 하루를 보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으니, 살아있는 동안은 늘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 운으로 정말 운 좋은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멋진 시가 어디 있을까 싶다. 흐린 날, 오늘 쓸 돈이 있는데
내일 쓸 돈을 걱정하느라 울적해지는 시간, 난로에 지핀 불꽃을 바라보며 잘 익은 고구마를 베어 먹으며
운 좋게도 이렇게 살고 있구나, 느낄 수 있어 기운 나게 해준 시 한 편을 읽었다.
728x90'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가난은/천상병 (0) 2020.11.02 가을에 어울리는 시 : 릴케 (0) 2020.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