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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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1. 1. 11. 14:08
시인의 말 좋아하는 시가 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오다말다 가랑비 가을 들판에 아기 염소 젖는 들길 시오리 개다 말다 가을비 두메 외딴 집 여물 쑨 굴뚝에 연기 한 오리 -작가미상- 오래전부터 나는 이 시를 부적처럼, 경전처럼 여겨왔다. 이 시에는 내가 생각하는 시의 가치가 다 담겨 있다. 2019년 10월 사윤수 표제시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 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섬마을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허공에 가맣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새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웅큼씩을 휙휙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덩이 같았다. 그러나 그 덩이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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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1. 1. 2. 20:05
표제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기억하고 싶은 시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 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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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 저녁의 슬하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30. 19:33
표제시 슬하 고인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고인의 슬하에는 고인이 있나 저녁이 있나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저 외로운 지붕의 슬하에는 말더듬이가 있나 절름발이가 있나 저 어미새의 슬하에는 수컷이 있나 암컷이 있나 가만히 몸을 두드리며 묻는 밤이여 가만히 차가운 쇠붙이에 살을 대며 묻는 밤이여 이 차가운 쇠붙이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차가운 이슬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어긋난 뼈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물렁한 살의 슬하에는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가 살고 있나 기억하고 싶은 시 저수지는 웃는다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즘음의 내 낙은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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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 어둠 속의 시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27. 17:09
序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씌어진 이 시들은 , 첫 시집 《딍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시들과 같은 아궁이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대부분 발표되지 않은 시들이지만, 발표된 뒤 당시의 여러 사정으로 간행되지 못한 시들도 다수 있다. 이 시집은 앞선 두 시집과 겨합하여 하나의 '퍼즐' 혹은 부절을 이루는 것으로, 이로써 참담했던 한 시절이 온전히 되살아나게 되었다.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시들을 고이 닦고 감싸 아름다운 책으로 염해주신 열화당께 감사드린다. 2014년 7월 이성복 기억에 남는 시 중학생 중학생들은 어디로 가는가. 학교를 파한 애늙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중학생의 처들은 어디에 있는가. 중학생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다. 중학생들은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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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천국/ 이영광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8. 20:56
표제시 아픈 천국 101동과 103동 사이 탄환처럼 새들이 빠져나간 자취가 몇가닥 활로 같다. 세들어 사는 자의 까칠한 눈으로, 나는 내가 먼 빛의 명멸을 봤다는 생각이 든다. 쨍한 무심결의 일순, 아연실색할 악착이 유리 같은 불안이 심중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깃털처럼 파란이 남아 아물대는 허공. 눈 그친 뒷산 잡목숲이 생가지 분지르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고 놀던 아이가 별안간 넘어져 크게 울고, 젊은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기도 한다. 다친 몸을 더 다친 마음이 새파랗게 여미어 안고 간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모르는 땅 고통과 위무가 오랜 친인척관계라는 곤한 사실이야말로 이생의 전재산이리라. 무릎 끓고 피 닦아주던 젖은 손 울던 손. 사색이란 진실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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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6. 10:50
표제시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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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6. 10:27
표제시 이별의 원심력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대해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거짓이 세상을 덮어버릴까 두려워서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파먹다가 안쓰럽게 부스러기가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에서 당신도 압축된 거짓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오래 물들어 있었던 탓이겠지요 우리가 마주 잡았던 손도 결국은 내가 내 손을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 그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인생의 절반이라는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려다 길을 잃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냄새를 따라 내려서 그렇습니다 광채는 사그라들고 공기는 줄어들고 나는 마비되었습니다 이별의 원심력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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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바 : 최승호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7. 10:45
시인의 말 얼마 전 나사(NASA)는 비소(As)를 먹고 생존하는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를 발표했다. 비소를 먹고 사는 놈이 있다니! 나는 그 놈도 한 영물(靈物)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텅 빈 채 죽은 것처럼 보이는 허공이야말로 크고 작은 모든 영물들의 어머니로서, 수도 없이 많은 영물들을 낳고 그들의 진화와 생멸을 주도해온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에게 좀 생경할 수도 있는 이번 시집은 그동안 쓴 나의 시들을 되비치어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일종의 문체연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소를 먹고 사는 그림자 생명체가 있듯이,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2010년 겨울 최승호 첫 시 01 그 오징어 그 오징어 부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