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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브리치 세계사 (예일대 특별판) 요약 3
    내가 읽은 책/곰브리치 세계사(줄거리) 2021. 3. 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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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지혜로운 정복자

     

    당시에 훌륭한 통치자란 한 가정의 아버지처럼 백성을 보살피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도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칼롤루스 대제(742~814)가 바로 그런 통치자였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를 포괄하는 나라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768년 왕위에 오르자 먼저 프랑스 전역을 정복하고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지배권을 로마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대제는 평생 자신을 교황의 수호자로 생각했다. 대제는 정복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도 잘했고 백성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는 독일 민족의 통일이었다. 게르만 부족의 언어를 가리키는 도이치가 이때 처음 생겨났다. 대제는 자신이 독일인의 왕일뿐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로서 모든 크리스트교의 보호자라 생각했다. 서기 800년 성탄절 전야에 로마 대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에서 교황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대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것이었다. 게르만족이 크리스트교의 영도 세력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대제의 계획이자 목표였으며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에 근접한 것은 카롤루스 치하에서뿐이었다. 서기 814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제국은 한동안 카롤루스의 손자 세 명에 의해 통치되다가 곧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로 분열되었고 두 번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신성 로마 제국은 그다음 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22 크리스트교 세계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나서 100년쯤 지났을 때 서양은 참담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동방의 기마 부족이 또다시 침입해 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유럽까지는 편한 길이 놓여 있어 약탈을 하러 가기에 좋았던 반면, 중국은 진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에 둘러싸여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훌륭한 질서 체계를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있었다. 이번에 침입한 부족은 마자르족으로 순식간에 오늘날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독일로 침입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마자르족은 헝가리에 눌러앉았으며 지금의 헝가리인들이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 마자르족을 물리친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도 독일의 영토로 선언하고는 랑고바르드족의 한 영주에게 봉토를 주었다. 교황은 오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96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독일왕들은 다시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크리스트교 세계의 보호자가 되었다. 모든 사제들의 수장은 교황이었고 모든 봉토의 주인은 황제였다. 이들은 늘 권력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었는데 이 싸움을 성직 임명권 투쟁이라 부른다. 1073녀 로마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독일의 왕은 하인리히 4세였다. 교황은 자신이 최고 성직자일 뿐 아니라 신에 의해 모든 크리스트교도의 지배자로 임명되었다고 믿었다. 독일 황제는 자신이 옛 로마 황제들과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이며 전체 크리스트교 세계의 보호자이자 최고 명령권자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켜 적개심을 표현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협상을 벌여 파문을 철회시키기 위해 호위대도 없이 홀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교황은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동시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것으로 교황의 친구들은 교황의 대단한 성공으로 간주했고, 왕의 옹호자들은 이를 주군의 커다란 이득으로 여겼다. 하인리히 4세는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주교들은 교회가 임명했고 교황이 크리스트교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23. 기사다운 기사

     

    기사란 말은 원래 말 타는 사람을 뜻했으며 기사란 훌륭한 군마를 타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왕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귀족들은 모두 기사였고 그들의 집사 또한 기사였다. 기사 제도는 하인리히 4세의 시대, 그러니까 서기 1000년경에 시작되어 수백 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지속 발전되었다. 기사는 단순히 말을 타고 싸우는 전사가 이니었다. 기사는 자신의 힘을 통해 신에게 봉사해야 했다. 기사는 여자나 가난한 자, 과부 혹은 고아처럼 힘없는 사람을 보호해야 했다. 기사는 정의를 위해서만 칼을 뽑아야 했으며 어떤 일에서든 신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했다. 또한 기사는 주군인 영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으며 기사는 난폭해서도 안 되었지만 비겁해서도 안 되었다. 훌륭한 기사라면 행동거지에 절도와 품위가 있어야 하고 보통의 전사들과는 달리 욕설이나 저주를 내뱉어서도 안 되었으며 체스나 문학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어야 했다. 기사들은 신과 크리스트교를 위해 싸우는 것을 주요한 사명이라 여겼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그렇듯 이교도인 아랍인의 손에 있었다. 크리스트교의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한 교황이 성지 해방을 위해 나서라고 기사들에게 호소했다. 기사들은 프랑스 영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지휘 아래 1096년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빨간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양어깨에 붙였기 때문에 이들은 십자군이라 불렸다.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은 아랍인과 싸워 이긴 뒤 이슬람교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 다음 참회를 하고는 성서를 외며 맨발로 그리스도의 무덤을 순례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던 십자군 원정은 크리스트교도들이 아랍인의 문화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아랍인의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독일과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24 기사 시대의 황제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붉은 수염을 멋지게 길렀기 때문에 붉은 수염 왕 프리드리히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독일 황제였지만 이탈리아에 자주 머물렀고 훌륭한 업적도 그곳에서 이루었다. 이탈리아에는 독일왕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할 권한을 가진 교황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필요한 돈도 있었다. 기사 시대에 독일에는 도시가 거의 형성되지 않아서 돈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로마 제국 시대부터 돈을 사용했다.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 같은 대도시가 많았고 상인도 많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인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시민들은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이탈리아로 온 프리드리히 1세는 법학자를 불렀고 자신이 로마 황제의 후계자임을 공표 받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독일 황제를 무시했기 때문에 허울뿐인 명성만 얻었을 뿐 실질적 효과는 끝내 거두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전형적인 기사였기에 십자군 전쟁에도 참전했다. 11893차 원정 때였다. 영국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왕 필립2세도 참전했는데 이들이 해로를 이용한 반면 프리드리히1세는 육로를 택했다가 소아시아의 어느 강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서 성장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전체 크리스트교 세계의 실질적 수장이었다. 그의 권력은 영국에까지 미쳐 영국왕 존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자 존왕을 파문시키고 영국 사제들의 예배 집전도 금지 시켰다. 분노한 영국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빼앗자 존왕은 두 번 다시 귀족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문건을 남겼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며영국에서는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모든 봉건 영주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다시 교황과 황제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인토켄티우스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무조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프리드리히 2세는 칼리프 및 술탄과 협약을 맺고 크리스트교 순례자들이 안심하고 그리스도의 무덤까지 순례하게 만들었다. 교황은 이런 행동을 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시켰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관을 직접 자기 머리에 얹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황제는 1250년 외롭게 세상을 떠났고 위대한 기사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가도, 기사 시대도 끝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시칠리아에 머물면서 교황과 반목하고 있는 동안 서양 세계는 다른 아시아 기마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몽골족은 징기스칸의 영도 아래 먼저 중국을 정복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햇다. 그런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으로 향했다. 서양 세계가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 이들의 지배자가 시베리아에서 죽었고 몽골 전사들은 방향을 돌렸다.

     

    25 도시와 시민

     

    수공업자들은 길드라 불리는 자신들끼리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길드는 나름의 규칙과 자기들끼리의 시합, 알록달록한 깃발 그리고 기본적인 원칙을 갖고 있었다. 길드의 회원은 서로 도와야 했고 손님 앞에서 다른 회원을 흉봐서는 안 되었으며 손님에게 질 나쁜 물건을 제공해서도 안 되었다. 또한 도제나 직공을 잘 대우해야 했으며 자신의 직업과 도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시민과 수공업자들은 도시에 교회를 세울 경우 자신들의 재산과 노동력 등을 정말로 아끼지 않았다. 새로 짓는 교회나 대성당이 이웃 도시의 자랑거리들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우며 더 화려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유대인은 고대의 민족들 중 유럽에 남은 유일한 민족이다.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유일하게 허용되는 것이 상업이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기사나 시민들도 이들의 돈을 빌려 쓰게 되면서 유대인은 더욱 미움을 샀다. 이런 유대인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받은 이들은 성서를 깊이 연구하여 특정 교리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사람들로 이단자로 불렸다. 이단자들은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다. 프랑스왕은 1300년대로 접어들기 직전부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영국은 1066년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만 왕가에 정복되어 그 지배를 받고 있었다. 노르만 왕가는 굳이 따지자면 프랑스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왕들은 영국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했다. 이런 때 프랑스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태어나지 않자 영국왕들이 자신들도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37년에 전쟁이 일어나 100년도 넘게 계속되었다. 바로 백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꾸준히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에서 점령지를 넓혀 나갔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이때 17세의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는 자신이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으며 완전 무장을 한 채 프랑스군을 이끌었고 마침내 영국군을 격퇴시켰다. 영국인들은 잔 다르크를 잡은 뒤 마녀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렸다. 1431녀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로 생각한 것은 시골뜨기 소녀가 단 2년 만에 100년 동안의 패배를 종식시키고 프랑스와 왕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26 새로운 시대

     

    1420년경 피렌체 시민들은 자신들이 중세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들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스스럼없는 무엇, 한마디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았고 이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고대이다. 고대인들의 유능함에 감탄했고 고대인들은 그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그랬다. 이들은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아테네인들이 남긴 저작을 즐겨 읽었다. 자유도시 피렌체가 아테네나 로마 같은 도시가 된 것 같았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재생이나 부활을 뜻하는 리나시멘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는데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고대의 정신을 소생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다시 기둥을 사용해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피렌체에 살았던 한 화가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농가의 하녀에게서 태어난 그는 1452년부터 1519년까지 살았다. 그는 병원에서 시체까지 구해다가 해부하고 연구했고 식물과 동물도 정확히 관찰했다. 그는 비행기의 가능성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인들이 책에 써 놓은 지식에 크게 기대지 않고 자연의 모든 현상을 실험에 의해 해명하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록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살던 시대에 피렌체에는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가문이 있었는데 양모 무역과 금융업을 주도하던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피렌체의 역사를 주도해나갔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육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메디치 가문의 부유한 성직자들이 교황으로 선출되고부터는 이탈리아 전역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로마로 몰려와 최고의 걸작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1453년 이후에는 책들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인 구텐베르크는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대신 글자 하나하나를 나무토막으로 깎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당시 세상을 한층 더 크게 변화시킨 발명품은 화약이었다. 중국인이 발명한 화약은 중국에서는 폭죽이나 불꽃놀이에 사용되었다. 화약은 1300년 이후 유럽에서 성을 무너뜨리거나 사람을 살상하는 대포로 사용되었다.

     

    27 새로운 세계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은 사막을 횡단할 때면 나침반을 사용했는데, 이 마법의 도구는 아랍인의 손을 거쳐 유럽인에게 전해졌다. 1200년경의 일이었다. 가난하지만 모험심이 강하고 야심도 큰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인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콜럼버스였다. 그는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동양에 닿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황금과 상아 진귀한 향신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갔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할 계획을 품고 서쪽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에스파냐를 출발한 날은 149283일이었다. 마침내 같은 해 1011일 밤 2시에 배 한 척에서 포를 쏘았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닿은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근처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착각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라 불렸고 콜럼버스가 상륙한 섬들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기 우연히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은 근대의 시점으로 간주된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을 태운 에스파냐 선박들이 발견한 것은 온순하고 가난하며 소박한 원주민이 사는 섬뿐이었다. 이 모험가들이 원하는 것은 원주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황금 장신구를 어디서 얻었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에스파냐 병사 150명과 기병 열세 명, 대포 서너 문을 끌로 해안에서 출발했다. 원주민들은 백인 침입자들이 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강력한 마술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코르테스는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도 계속 전진했고 마침내 자신에게 사신과 선물을 보내왔던 강력한 왕의 제국으로 들어섰다. 왕의 이름은 몬테수마였고 그 나라와 수도의 이름은 똑같이 멕시코였다. 코르테스는 이곳의 군주를 계략을 써서 포로로 잡았다. 백성들 중 누군가 돌을 던졌고 몬테수마는 그 돌에 맞아 죽었다. 코르테스는 찬란한 도시 멕시코를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멕시코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 민족들을 끔찍한 방식으로 말살시켰다.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로 가는 올바른 항로를 발견했다. 포르투갈 사람들 또한 고대 인도인들의 지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 역시 황금뿐이었다.

     

    28 새로운 신앙

     

    1500년 이후에는 교황이 로마에 머물렀으며 사제직보다 사치와 권력에 더 관심을 두었다. 교황들은 성 베드로 성당이 만족스러울 만큼 화려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빼어난 교회를 새로 짓고 싶어 했다. 교황의 환심을 사려는 많은 사제와 수도사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방법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신자들에게 죄를 면해 줄 테니 돈을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를 면죄부라 불렀다. 당시 독일의 비텐베르크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속한 마르틴 루터라는 수도사가 살았다. 루터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직권을 남용하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실은 벽보를 교회 정문에 붙여서 면죄부 매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루터의 글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팔려나가 널리 읽혔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견해에 동조했다. 루터와 신봉자들은 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경건함을 부흥시키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영주들도 많이 동참했다. 1519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가 독일 황제가 되었다. 1527년 로마는 카를 황제의 용병들에게 점령되어 약탈 당했고 이탈리아의 풍요로움도 파괴되었다. 제국 의회는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파문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루터는 법률의 보호 바깥에 놓인 것이다. 작센 공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보호자로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붙잡아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데려왔다. 자발적인 구금 생활을 하는 동안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는 모든 독일인이 성서를 읽기를 원했지만 당시에는 표준적인 독일어가 없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를 창안했다. 이 독일어는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고 표준어로 사용된다. 교황권에 중대한 손실을 미친 또 다른 사건이 영국을 통치하던 헨리 8세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인 앤 불린과 재혼하려 했다. 교황이 이를 허용하지 않자 헨리 8세는 영국을 로마 교회와 분리시키고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했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계속해서 영국왕의 박해를 받았지만 어쨌든 영국은 로마 교회와 영원히 분리된 것이다.

     

    29 교회 사이의 투쟁

     

    독일의 젊은 귀족인 로욜라는 위기에 처한 교회를 위한 투사가 되고 싶었다. 그와 친구들은 수년의 훈련 끝에 자신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예수의 군대를 뜻하는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했다. 예수회는 실제의 군대 못지 않게 신중하고 강력한 집단으로 루터의 비판을 야기한 교회의 폐단을 제거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는 대신 교회 자체를 혁신하는 길을 통해 초기 크리스트교도의 경건함을 회복시키고, 그리하여 종교 개혁에 효과적으로 맞서려 한 이런 노력을 반종교개혁이라 부른다. 종교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의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엄격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얼마나 신앙심이 깊으며 교회에 봉사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귀족들도 더이상 화려하고 풍성한 옷을 입지 않았다.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영주 사이의 싸움은 독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를 위그노라 부른 프랑스에서는 여왕이 위그노파 귀족들을 왕궁에 초대한 뒤 모두 살해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모든 가톨릭 영주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엄격하며 가차 없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릇된 신앙과 싸우는 것이었다. 펠리페왕은 예전의 독일 황제들처럼 자신을 교회의 수호자이자 투사라고 생각했다. 북부의 부유한 도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이 많이 살았다. 펠리페왕은 이들에게 개종을 강요했지만 받이들여지지 않았다. 펠리페왕의 전권 대사 알바 공은 네덜란드 시민들과 귀족들을 냉혹하게 처형했다. 잔인한 처사에 분노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579년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이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 영국의 지배자는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였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톨릭교도의 공세에서 영국을 지키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펠리페왕과 싸우던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을 도왔다. 분노한 펠리페 왕이 가톨릭 교권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함대를 몰고 영국으로 침범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그들의 영해에서 에스파냐 함선을 쫓아냈을 뿐만이 아니라 인도와 아메리카의 부유한 항구에서도 에스파냐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머지않아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30 참혹한 시대

     

    독일의 황제들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이었기에 제국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지배력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했다. 1618년 불만을 품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세 명의 황제 대표단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표단은 거름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치지도 않았지만 이 일은 삼십 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당시의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나운 용병들이 벌이는 끔찍한 학살에 가까웠다. 스웨덴에 이어 프랑스도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지략이 비상한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휘 아래 유럽 최강의 세력가인 독일 황제와 에스파냐인들을 굴복시키고 프랑스를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들 기회를 엿보았다. 30년 동안 참혹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각국 사신들이 만났고 지루하고도 혼란스러운 협상을 벌인 끝에 1648년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골자는 모든 것을 삼십 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라인강변의 독일 성채들과 도시들을 얻어내 이 전쟁의 유일한 승자가 되었다. 악마와 마녀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때는 삼십 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참담한 시절이었다. 독일 각지에서 수백, 아니 수천 명이 화형을 당했다. 자연의 영역에 엄청난 마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알아낸 사람은 이탈리아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갈릴레이는 아무 설명 없이 적어놓은 한 문장 때문에 고발당했다. 그 문장이란 태양은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태양이 언제나 정지해 있다는 학설은 성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단일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이는 이단자로 화형당하거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학설을 부정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결국 지동설을 주장한 자신은 비천한 죄인이라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갈릴레이는 그보다 앞서 살았던 많은 선구자들과 달리 화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서에 서명을 하고 난 후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오늘날 우리가 계산 공식을 사용해서 자연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고 비행기나 로켓, 라디오 등의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은 참된 용기를 발휘한 사람들이다.

     

    (31~40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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