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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3. 14:46728x90
표제 시
친애하는 언니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 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기억하고 싶은 시
꿈꾸는 모비딕
갈림길의 동의어는 주름입니다 주름 속에선 어딜 가든 미로입니다 아버지는 바다가 푸르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벽하늘과 닮았습니다 같은 숨을 공유하듯 하늘에선 별을 키우고 바다에선 꿈을 키웁니다 그러므로 별과 주름과 바다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내 꿈에서만 등장합니다 오직 바다에만 사는 생명체가 있다고 합니다 둥둥 떠다니거나 사라지거나
'섬', 처음 녀석의 이름을 불렀을 때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새와 눈을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촉수로 빨아들이까봐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심해에서 꿈을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을 오래 비운 이유가 아가미로 호흡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란 걸 그날 이후 파도를 단숨에 찢어 오대양의 내장으로 들어가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심장을 채집하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섬'이 아버지의 꿈을 남김없이 빨아 먹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포악한 주름을 가진 녀석은 매일밤 어떤 갈림길에 들어설지 알지 못할 일입니다
이후로 헤맸던 미로는 짙은 하늘과 거칠게 호흡하는 '섬'이었습니다. 새벽을 넘나드는 녀석은 수많은 어부의 주름 속에서 헤엄쳤습니다
녀석의 목을 잡고 갔던 길의 끝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발인이 시작되는 목요일이었습니다.
시인의 말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2020년 9월 10일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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