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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3. 13:06728x90
표제 시
백일홍
병원에서 준 소염제를 열흘 먹었더니
깊은 잠을 자는 며칠이 되었다
어딘가의 염증과 부스럼을 이제는 내 몸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도록 창문에 비가 스미는 하오
사람들은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얼굴이 서로를 다독거리고
늘어진 옷에 몸을 함께 들이민 가을과 저녁이
서로를 어루만진다
창밖의 백일홍은 겨드랑이마다 새 가지를 밀어 내
여름 내내 꽃을 피췄는데도
지지도 못하고 마르며
여태 피어 비를 맞고 있다
석 달 열흘은 옹이 몇 개쯤 지닐 만한 순간
그리고 다가올 폭설의 날들은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기억하고 싶은 시
풍경이 되고 싶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밖의 풍경을 데리고 가겠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그 은행나무숲에 나는 평생 한 번도 찾아가지를 못하였지. 더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숲의 셀 수 없는 표정. 내가 볼 때만 내 안에서 풍경이 되는 풍경. 살다보면 이 집의 문도 밖에서 영영 잠글 때가 오겠지. 그러면 창밖 풍경을 데리고 다니다가, 애인인 듯 사귀다가, 나란히 앉아 더 좋은 풍경을 함께 보다가, 그와도 이별을 예감할 때가 오겠지. 그때가 오면 슬쩍 고백해보는 거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너의 뒤가 보고 싶어. 그곳으로 가서 너의 창밖에 사는 한 마리 무심한 풍경이 되고 싶다고 부탁해보는 거야. 누군가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살아간다는 거, 비바람에 함부로 흔들릴 수 잇는 표정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나는 너무 오랫동안 풍경을 보기만 하며 살았던 거지.
시인의 말
길에 떨어져 터진 버찌들을 보면
올려다보지 않아도 내가 지금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등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보리 추수는 이미 지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오래다.
보리서리를 눈 감아주시던 외할머니의
거룩한 삶이 대관령 아래에 있었다.
검은 흙 속에서 감자가 익으면 여름이라는 것을 알 듯
내 몸이 강릉에 가고 싶을 때가 많다.
강릉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2018년 8월
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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