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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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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색은 보라인데 햇볕을 정면으로 받고 찍은 사진이라 그 색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표제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얖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기억하고 싶은 시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맞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시인의 말

     

    편지 아닌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해요.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2020년 4월

    이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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