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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5. 05:50728x90
표제 시
거울아 거울아
1.
의자 위에 수건 한 장이 걸쳐 있다 의자는 수건에 짓눌려 있지만 그 무게를 모른다 의자를 슬쩍 빼내어도 수건은 아랑곳없이 그 자리를 지킬 듯이 고요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다 거울만 바쁜 댄스 연습실
2.
수건이 닦고 지나간 눈이며 입이며 귀가 침묵을 학습할 것처럼 저 수건이 품고 간 알몸과 맨발이 비밀을 훈련한 것처럼 젖는 것을 전수받는 오랜 습관처럼 숭고한 침묵을 주무르며 손을 닦는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3.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서 수건은 칙치하고 은밀하게 말라간다 침묵이나 비밀과도 무관한 의자 위에 수건은 단지 정물화처럼 거기 걸쳐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거울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비밀 아니 것도 비밀인 채로 흘러 나오고.
기억하고 싶은 시
병을 나눠먹는 순두부
함께 순두부를 먹는 날이었다
순한 것이 우리를 수그리게 했고
뜨거운 것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식당에는 순두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하고
냄새까지 순해진 뚝배기를 앞에 놓고
둘은 숟가락을 넣었다 뺐다 했다
폐질환을 나눌까요 간질환을 나눌까요
가능한 많은 병을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다정해도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병명도 주고받지 못했다
주소는 달랐지만 통증을 나누기엔 적절한 사이
몇 개의 병을 예약하고
우리는 좀더 정중히 순두부를 퍼먹었다
뚝배기가 받는 절은
어떤 기원처럼 병을 잘 스미게 했다
시인의 말
한동안 서울과 양평을 오갔다.
아픈 사람들이 서울에서 양평으로 건너가는 것은
칠흑의 한밤중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몸을 건너가는 병이 구름 사이로 떠다니지 않게
병명이라는 검은 돌들을 별자리처럼 놓아본다.
이 시집이 별들을 가리키는 헛된 손가락이라 할지라도
언니를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
2020년 11월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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