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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6. 10:50728x90
표제시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기억하고 싶은 시
상자
상자들을 두고 그들은 떠났다
아래층에 맡겨둔 봄을
아래층에 맡겨둔 약속을
아래층에 맡겨둔 질문을
아래층에 맡겨둔 당신을
아래층이 모두 가지세요
그 상자를 나는 열지 않아요
먼저 온 꽃의 슬픔과 허기를 재울 때
고요히 찬 인연이 저물 때
생각해보면 가능이란 먼 것만은 아니었어요
감상: 가능이란 먼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 마음에 박힌다. 무엇이든 가지고 싶었던,
열고 싶었던, 인연을 엮고 싶었던, 사소한 절제도 한없이 고통스러웠던 많은 날들, 그러나 다른 세상을 엿볼수 있는 이 순간, 이제는 그 욕망을 열지 않아도 되는 '가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시인의 말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갔다
2020년 12월
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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