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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바 : 최승호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7. 10:45728x90
시인의 말
얼마 전 나사(NASA)는 비소(As)를 먹고 생존하는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를 발표했다. 비소를 먹고 사는 놈이 있다니! 나는 그 놈도 한 영물(靈物)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텅 빈 채 죽은 것처럼 보이는 허공이야말로 크고 작은 모든 영물들의 어머니로서, 수도 없이 많은 영물들을 낳고 그들의 진화와 생멸을 주도해온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에게 좀 생경할 수도 있는 이번 시집은 그동안 쓴 나의 시들을 되비치어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일종의 문체연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소를 먹고 사는 그림자 생명체가 있듯이,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2010년 겨울
최승호
첫 시
01 그 오징어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 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01-1
그 오징어 부부는
싸울 때
서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
01-2
그 오징어 부부는
다리가 뒤엉킨 채
징하고 징그러운 세월을 살아왔다
01-3
그 오징어는 죽을 때
혼자
다리로 얼굴을 감싸고 울지 모른다
01-4
눈이 축구공만한 초대왕오징어는 길이 9미터의 허무를 끌고 캄캄한 심해의 고요 속을 돌아다닌다, 라고 눈 오는 밤 백지에 쓴다
기억하고 싶은 시
17 그동안
그동안 시는 나의 돛이자 덫이었다 .시가 부풀어 나를 설레게 하고 사해(死海)를 항해하게 했으며 닻 내릴 곳은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일깨워주었다.
17-1
사막으로 변해버린 아랄 해를
말 탄 남자가 지나간다
17-2
흙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누워 있던 한 쌍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이야기의 범선들이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한다
17-3
두 마리 새를 한꺼번에 잡는
덫-결혼이
덫이고 닻이며 돛인가?
17-4
절망의 닻을 끌어올리는 익살스런 농담들
유머가 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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