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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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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시

     

    붉은 빛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부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으키고 싶었지요

     

    볼이 떨어져나갈 듯 치운 날이었어요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

     

    동백처럼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대구 알처럼 붉은 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

     

     

     

    기억하고 싶은 시

     

     

    풀과 양들의 세계사

     

     

    풀이 사관이다

    사초(史草)니까

    역사의 주인은

    풀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굳건한 성채인들 풀이

    정복하지 않은 성이 없다

    풀은 국경선을 뒤흔들고 넘나든다

    풀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인가

    풀이야마롤 사마천

    뿌리를 뽑는다 한들

    궁형의 치욕이 온다 한들

    풀을 당할 수 없다

    풀은 뽑히면서도 씨앗을 퍼뜨린다

    풀의 열렬한 독자가 바로 양들이다

    풀을 따라 양들은 어디든 간다

    양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위도와 경도

    국경선으로 젖을 짜는 노래가 나의 시경(詩經)이다

    풀의 기억은 망각,

    그를 알아 양은 성을 함락해도 애써

    머물지를 않는다

    풀 죽은 정복자의 신민이 되려 않는다

    푸른 잉크로 폐허를 뒤덮는

    사초를 좇을 뿐

    국경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풀과

    양들의 세계사

     

     

    시인의 말

     

    거위와 점등인의 별에서

     

     스물다섯에 늦깍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연극판을 기웃거리다가 철 지난 포스터처럼 뜯겨져서 거리를 떠돌아다닌 뒤의 일이었다.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친구들은 졸업을 준비할 나이였으니 낙오병이라는 자괴감이 없지 않았다.

     

    (중략)- 모두 5쪽으로 시집 뒤편에 수록됨.

     

      어느 날 수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가는 길에 가끔씩 부딪치던 행정실 직원이었다. 그는 오래 망설이던 말을 겨우 꺼내듯이 수줍게 점심을 같이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그는 몇 년간 지켜보았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동생 같아서 그저 밥 한끼 사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안경 너머에서 오는 그 깊은 눈빛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엔 당시 내가 한창 빠져있던 백석의 「고향」에서 보았던 온기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타향에서 혼자 앓아누워 있던 시인이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고 노래한 의원의 그 온기 말이다. 나 역시 그의 눈빛에서 떠나온 부모와 고향의 흙냄새를 마주하였으리라.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밥을 대접받았다. 그 '밥심'으로 시를 쓰고 책을 만들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물론 밤새 습작을 하던  나 대신 순찰을 돌던 그 극성스럽던 거위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2020년 봄 동탄 돌모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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