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내가 읽은 책/리뷰 2020. 12. 8. 20:06728x90
혁명이라는 단어는 내게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떠올리게 한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글자만 안다면 애벌레들까지도 자신의 책을 읽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는 현재에 대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던 이 책의 내용을 부제를 보고 약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부제 뒤에 어떤 제시도 없이 바로 펼쳐진 본문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밤, 문학의 승리
작가는 자신이 세상의 정보로부터 차단된 생활을 선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잡다한 정보들이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명령을 내려서 거기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혀 있는 비평가나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은 늘 언제 무엇에 대해서든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만 하는 초조감에 시달린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바쁜 현대생활에서 어쩌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책이 있으므로 그 중에서도 니체를 읽으면 다른 것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으므로 이런 생활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한 번 읽고 말 정보와 독서를 구분해서 독서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세상의 정보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독서는 독자를 온전히 그 책 속에 빠뜨리게 하는데 만약 독자가 독서를 통해 작가의 생각을 완전히 알아버리고 작가의 내면과 일치하게 된다면 스스로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한다. 이때 독자에게는 책에 빠지기 전에 스스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독서가 난해하다고 느끼거나 재미없다고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독서를 할 때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어서 작가와 일치하는 기쁨을 맛보라고 하는데 그 즐거움은 신마저도 선망하게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루터의 개혁은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많은 책을 쓴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5세기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기득권의 부패로 민중들을 착취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 가는 티켓인 “면죄부” 판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제가 된 루터는 성서를 읽고 읽었더니 현재의 교회질서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127권의 책을 쓴 종교개혁가가 되었다. 루터는 문학가이면서 혁명가였다. 글을 읽고 알게 되면서 현실의 부당함에 눈 뜨게 되고 자연스럽게 개혁으로 연결되는 것을 루터가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지 문학은 혁명의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독재자들은 문학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루터의 경우를 들어서 읽는 일은 변혁을 이끌어 내는 힘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작가는 아시아 중에서 다소라도 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을 때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일본인의 우월감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루터에 이어 또 하나의 혁명인 무함마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6세기말, 빈부격차와 철저한 여성 차별의 시대였던 아랍에서 고아로 자라 상인이 되었다. 25세 때 40세인 하디자의 구혼으로 결혼을 하고, 마흔 살에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신의 계시가 적힌 책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작가는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책을 준 것은 문맹인 무함마드에게 읽을 기회를 주는 것이고 그래서 읽을 수 있는 일 자체가 천사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읽으라는 것을 읽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시를 외웠기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문학을 혁명의 힘이라는 부른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옴진리교의 종말론은 오히려 성서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이것만 봐도 옴진리교가 성서를 읽지 않았고, 읽을 능력이 없는 단체라고 보았다. 그래서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는 것이야말로 이런 오류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나찌 같은 병든 사고에 저항할 수 있으며, 올바른 독서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읽고 쓰는 일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고 하는 내용은 많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미화하거나 과장되는 책을 펴내고 있는데 거기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짚어낼 줄 아는 정확한 독서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번 되풀이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 대목이었다.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루터파는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고 말했다. 또 그 전의 야만적인 시대를 중세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학파나 12세기 학자들 역시 이미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라고 불렀는데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12세기에 일어난 혁명을 “중세 해설자 혁명”이라고 이름 붙이며 이것이야말로 지금 현대와 연결되는 커다란 혁명이라고 말한다. 교황혁명으로 로마법과 교회법이 결합되고 250년 만에 공의회가 부활되는데 제1차 라테리노 공의회는 근대 의회의 기원이 된다고 한다. 이때 수많은 신학자와 법학자들은 법문을 고쳐 쓰며, 혹은 사본을 베낄 때라도 한 구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혁명은 현재 우리의 세계를 있게 한 “초기 설정”한 혁명이 분명하지만 이 것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이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다시 한 번 혁명을 이룰 수도 있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용기다.
다섯 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무언가 끝났다고 말하거나 시작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유치하며 병든 사고의 형태를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 비평가와 사상가, 문학가 중에 이런 종말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는데 이들은 이미 이 세계는 늙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문학은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부정적인 말이다. 인류의 탄생이 20만 년 전이었고, 문자가 탄생한지는 5,00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문학이 아직 젊은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이가 발명된 지 60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책은 일본의 사상가인 사사키 아타루가 두 명의 지인을 앞에 두고 다섯 번에 걸쳐, 책을 읽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것을 강의한 내용이다. 매번 변덕스런 여름 날씨로 시작하는 저녁의 강의 내용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금방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까다로운 이야기들이었다. 프롤로그도 없이 시작된 본문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작가의 발문이 적혀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작가가 2년 전에 발표한 『야전과 영원-푸코 라캉 르장드르』을 먼저 읽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가령 무슨 말을 이어나가다가도 ‘『야전과 영원』에서도 논했습니다만’ 이라고 한다거나, ‘『야전과 영원』에서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돌리는 대목들은 작가의 무신경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독서를 방해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젊은 학자답게 독서에 대한 과감한 해석과 도전적인 내용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결국 내가 이 학자의 강의를 듣는 청중의 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읽은 이 책의 내용은, 읽어야 만이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방법을 찾을 수 있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혁명도 가능하다 고 말하고 있었다.
728x90'내가 읽은 책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가의 작업실/박영택 (0) 2020.12.21 명견만리/ 인류의 미래편 (0) 2020.12.18 명견만리 (미래의 기회편)/KBS명견만리 제작팀 (0) 2020.12.0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0) 2020.12.01 책은 도끼다/ 박웅현 (0) 202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