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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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2. 22:27
표제시 붉은 빛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부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으키고 싶었지요 볼이 떨어져나갈 듯 치운 날이었어요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 동백처럼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대구 알처럼 붉은 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 기억하고 싶은 시 풀과 양들의 세계사 풀이 사관이다 사초(史草)니까 역사의 주인은 풀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굳건한 성채인들 풀이 정복하지 않은 성이 없다 풀은 국경선을 뒤흔들고 넘나든다 풀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인가 풀이야마롤 사마천 뿌리를 뽑는다 한들 궁형의 치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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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유홍준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 20:31
표제시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대나무 우듬지가 요렇게 살짝 휘어져 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앉아도 휘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는 보름달 속에 들어가 있다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쫑긋하고, 날개를 다 접은 새다 몸집이 작고 검은 새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창문 앞에 앉아 나는 외톨이가 된 까닭을 생각한다 캄캄하다, 대나무 꼭대기를 거머쥐고 있던 발가락을 펴고 날아가는 새 기억하고 싶은 시 창틀 밑 하얀 운동화 생각이 많을 때마다 나는 운동화를 빠네 낙엽을 밟고 오물을 밟고 바닥 밑의 바닥을 밟고 다닌 기억들아 깨끗이 빨아놓은 운동화 뒤꿈치에는 물이 고이네 생각의 뒤꿈치에는 늘 물이 고여있네 나는 지금 맨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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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6. 13:38
표제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얖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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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5. 05:50
표제 시 거울아 거울아 1. 의자 위에 수건 한 장이 걸쳐 있다 의자는 수건에 짓눌려 있지만 그 무게를 모른다 의자를 슬쩍 빼내어도 수건은 아랑곳없이 그 자리를 지킬 듯이 고요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다 거울만 바쁜 댄스 연습실 2. 수건이 닦고 지나간 눈이며 입이며 귀가 침묵을 학습할 것처럼 저 수건이 품고 간 알몸과 맨발이 비밀을 훈련한 것처럼 젖는 것을 전수받는 오랜 습관처럼 숭고한 침묵을 주무르며 손을 닦는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3.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서 수건은 칙치하고 은밀하게 말라간다 침묵이나 비밀과도 무관한 의자 위에 수건은 단지 정물화처럼 거기 걸쳐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거울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비밀 아니 것도 비밀인 채로 흘러 나오고. 기억하고 싶은 시 병을 나눠먹는 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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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3. 14:46
표제 시 친애하는 언니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 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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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3. 13:06
표제 시 백일홍 병원에서 준 소염제를 열흘 먹었더니 깊은 잠을 자는 며칠이 되었다 어딘가의 염증과 부스럼을 이제는 내 몸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도록 창문에 비가 스미는 하오 사람들은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얼굴이 서로를 다독거리고 늘어진 옷에 몸을 함께 들이민 가을과 저녁이 서로를 어루만진다 창밖의 백일홍은 겨드랑이마다 새 가지를 밀어 내 여름 내내 꽃을 피췄는데도 지지도 못하고 마르며 여태 피어 비를 맞고 있다 석 달 열흘은 옹이 몇 개쯤 지닐 만한 순간 그리고 다가올 폭설의 날들은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기억하고 싶은 시 풍경이 되고 싶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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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3. 11:25
표제 시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기억하고 싶은 시 우리는가볍게 웃었다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 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노은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 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 그런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 팔을 내두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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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목화, 어두운 마음의 깊이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19. 16:02
표제 시 목화, 어두운 마음의 깊이 낙타가 바라보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화요일. 슬픈 내 마음 저기 있네, 햇살과 햇살 그사이에 막연히. 목화, 내 여인. 나의 이별, 목화. 아름다웠던 사랑도 아름다운 추억 앞에서는 구태의연하구나. 절망과 내가 이견이 없어서 외로웠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가서 나는 왜 아직 여기 홀로 서 있나, 막연히. 청춘은 폭풍의 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등불이었지만 재가 되어 사그라지는 내 영혼에 상처로 새겨진 문양이여. 목화, 눈을 감고 있어도 도저히 보고 있지 않을 수 없는 목화. 어쩌면 혐오와 환멸은 인생이 자유로 가는 문이어서 계절이 흐르는 이곳에서는 절망의 규정마저도 바뀌는구나. 낙타가 쓰러져 죽어 있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화요일에 마지막으로 기도하듯 맨 처음 그리운 나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