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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1. 1. 1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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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좋아하는 시가 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오다말다 가랑비

    가을 들판에

    아기 염소 젖는

    들길 시오리

    개다 말다 가을비

    두메 외딴 집

    여물 쑨 굴뚝에

    연기 한 오리

     

    -작가미상-

     

    오래전부터 나는 이 시를 부적처럼, 경전처럼 여겨왔다.

    이 시에는 내가 생각하는 시의 가치가 다 담겨 있다.

     

    2019년 10월

    사윤수

     

     

      표제시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 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섬마을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허공에 가맣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새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웅큼씩을 휙휙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덩이 같았다. 그러나 그 덩이는 식물성이라기보다 유리질로 비쳤다. 응집할 때마다 와장창창 부딪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주검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열 편대로 비행할 때는 수백 마리 날갯짓이 허공의 살과 뼈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럴 때면 까마귀떼가 까무룩 보이지 않았다. 허공의 비늘만 일제히 일어섰다가 차례로 쓰러졌다.

     

      허공에도 숨을 곳이 있을까? 아니면 까마귀들은 구름 속에 들었거나 산을 넘었을까? 그 순간 외각을 찢으며 다시 나타난 새떼, 이번엔 검은 물줄기를 뿜어 올리듯 높이 솟구치더니 초서 갈필의 붓끝으로 내리꽂는다. 오! 저게 다 문장이라면 똑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 검은색만으로도 변려체를 구사할 수 있겠구나. 그 사이에 새떼는 붓을 버리고 거대한 지느러미를 이루었다. 유유했다.

     

      허공의 새떼는 바닷속 물고기 떼처럼 날고 바닷속 물고기 떼는 허공의 새떼처럼 헤엄친다. 사람이 바다를 바다라 이름 붙이고 허공을 허공이라 이름 붙였는데 허공과 바다가 같고 새와 물고기가 다르지 않았다. 저 바름까매기들이 날아오민 바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 팔순 노파가 구시렁거리며 어벙저벙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오는 허공의 끝자락까지 한사코 맺고 풀며 서부렁 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춤추는 까마귀 떼.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를 때는 허공이 비단이며 까마귀 때가 가위이고 까마귀 떼가 종횡으로 나풋나풋할 때는 추월적막 흑공단 같으니, 이 비단타령으 어느 게 비단이고 어느 게 가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어둑시근 다 저물어 이제 까마귀 떼는 소지한 재를 흩뿌린 듯 가물가물했으므로, 시나브로 또 어느 게 까마귀고 어느 게 어둠인지 나는 망막했다.

     

     

      별들이 톳여**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 판소리 <비단타령>에서 인용. 발이 아주 자늘고 앏은 비단과 검은 비단이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추월적막 흑공단도 비단임.

     

    ** 썰물 때바다 수면 위에 드러나는 바위의 윗부분.

     

    #3연의< 저 름까매기들이 날아오민 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된 두 개의 바는 원문에 'ㅏ' 대신 아래아','를 사용했음.

     

    기억하고 싶은 시

     

    새들이 남긴 적막이나 받아쓰고

     

     

    저편 폭죽 터지는 소리에

    다리 밑 난간에서 잠자던 새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다급히 고요에서 빠져나오는 새들

    이리저리 날개짓이 뒤엉킨다

    구겨진 종이뭉치가

    허공에서 찢어지는 거 같다

    몸이 이불이며 집일 테니

    이고 지고 할 것도 없는,

    그저 떠나면 그뿐인 삶의 편린들

    새들은 뒤끝 없이

    금세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나는 새들이 남긴 적막이나 받아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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