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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내가 읽은 책/리뷰 2020. 12. 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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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맹 가리라는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름을 쌍둥이처럼 불러 주어야한다. 우리에게 모모라는 이름을 가르쳐준 에밀 아자르 역시 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유태인으로 태어났지만 철저히 프랑스 인으로 자랐다. 프랑스 인으로 살아야만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었다. 로맹 가리는 변호사가 되기 위한 연수를 받던 중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공군에 입대, 종전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 후 외교관이 되어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 대리대사로 근무하던 중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하면서 정계와 예술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인기를 받는 스타가 되었다.

     

    5년 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 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미 공쿠르 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총영사까지 지낸 화려한 이력의 작가에게 평론가들은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계속 작품을 발표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이어나갔다.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두 번 다시 수여하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 받게 되자 로맹 가리는 거부 했지만, 상은 작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게 수여한다는 협회의 설득 끝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오랜 세월동안 비밀로 묻혀 있다가 그가 죽기 전 유서처럼 남긴 글에서 밝혀진다. 작가로서, 외교관으로서 더 없는 영예를 가진 로맹 가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편견 없는 비평을 원했기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66세의 나이에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에는 로맹 가리의 단편이 16편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다 보면 책을 덮기가 아까울 만큼 좋은 작품들이 가지런하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죽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해 해변을 찾는 새들과 지상의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쟈크 레니에라는 남자를 통해 과학적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의문점을 풀어가고 있는 내용이다. 먼 바다의 돌섬에서 살던 새들은 죽을 때가 되면 어떤 이유도 없이 모래가 있는 해변으로 날아온다. 어느 날, 새떼들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해변으로 온 한 여자가 자살을 시도한다. 쟈크 레니에는 세상의 모든 희망을 버리고 이곳에 흘러들어와 까페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 여인을 구해준 뒤 아주 작은 희망 같은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여인은 떠나고 주인공은 죽어가는 새떼들처럼 해변에 남게 되고 다시 희망에 매달린 자신에게 절망한다. 본질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이 해변의 파도처럼 밀려와 읽는 이에게 쓸쓸함을 더해주는 이야기다.

     

    류트는 평생 평온한 삶을 살아온 N백작의 이야기다. 그의 가슴 속에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기질이 들끓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을 위해 살고자 류트라는 악기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그의 아내는 평생 그래왔듯이 아무도 모르게 그의 실험적인 위험한 행동을 묻어버린다. 이상과 현실 세계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활인의 슬픈 이야기다. ‘어떤 휴머니스트는 가장 믿었던 지인의 배반 속에서 진실을 모른 채 죽어가는 유태인이 주인공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찌는 물러갔지만 주인공은 스스로 내려 간 지하실에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고용인 부부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든 재산을 차지한 채 영원히 주인공을 지하실에 유배한다.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이다. 삶의 비루함을 제대로 보여준 내용이다. 이쯤해서 조금 웃기는 이야기 하나,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에는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탐험가로 나서는 이발사가 등장한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그녀를 위해 세계의 곳곳을 탐험하며 떠나온 그녀와 마을 사람들에게 탐험지에서의 근황을 엽서로 전달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험심 가득한 그를 위해 동상을 세우며 그의 여정에 주목하지만 어느 날부터 소식은 끊기고, 사람들은 그가 탐험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단정한다. 한 편, 이십 년 동안 단골 이발사였던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관 한 사람이 현장에 도착한다. 죽은 이발사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여 있다. 편지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아주 오래 전에 탐험가가 아닌 그 마을의 이발사와 결혼해 행복하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삶은 어떤 정답도 없이 굴러가는 것이다. 인간의 치사함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한 이야기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그가 다음번에는 잘해 준다고 했다네였다. 패전한 독일 군인에게조차 철저히 지배당하는 어느 유태인의 희망을 통해 인간의 나약하고도 비루한 심성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같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개미들의 삶을 조밀하게 들여다 본 것이라면 로맹 가리의 단편들은 인간이라는 종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어떤 면도 지나치지 않고 똑바로 볼 수 있는 작가의 순수한 영혼은 지상에 오래 머무를 수 가 없었나보다. 짐짓 보고도 못 본 척 하거나, 겹겹이 옷을 껴입은 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촉수를 가졌기에 작가는 운명보다 한 발 앞서 스스로 운명을 찾아갔다. 저마다 상처를 가진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관찰보고서 같은 단편들을 읽고,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운명에 걸린 채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절망 뒤에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도 로맹 가리다. 일평생 화려했지만 쓸쓸했던 작가의 절망과 희망 사이를 함께 배회하며 인간의 각진 면들을 직시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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