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아메바 : 최승호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7. 10:45
시인의 말 얼마 전 나사(NASA)는 비소(As)를 먹고 생존하는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를 발표했다. 비소를 먹고 사는 놈이 있다니! 나는 그 놈도 한 영물(靈物)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텅 빈 채 죽은 것처럼 보이는 허공이야말로 크고 작은 모든 영물들의 어머니로서, 수도 없이 많은 영물들을 낳고 그들의 진화와 생멸을 주도해온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에게 좀 생경할 수도 있는 이번 시집은 그동안 쓴 나의 시들을 되비치어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일종의 문체연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소를 먹고 사는 그림자 생명체가 있듯이,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2010년 겨울 최승호 첫 시 01 그 오징어 그 오징어 부부는..
-
명견만리 (미래의 기회편)/KBS명견만리 제작팀내가 읽은 책/리뷰 2020. 12. 7. 10:15
요즘 중국 사극 "미월전"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진시황의 증조모가 되는 초나라 공주 미월이 갖은 고생 끝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태후가 되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몰아서 방송 하기에 띄엄띄엄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 내용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미월이 어느 후궁에게 한 말입니다. "당신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장면에서 미월이 당신의 말을 믿는다고 하면서 덧붙인 말입니다. 이 말이 유독 마음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저 스스로 멀리 보는 식견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견만리'라는 말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미래의 일을 환하게 살펴서 알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사자성어를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은 "현실에서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향후 인류가 만나게 ..
-
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2. 22:27
표제시 붉은 빛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부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으키고 싶었지요 볼이 떨어져나갈 듯 치운 날이었어요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 동백처럼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대구 알처럼 붉은 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 기억하고 싶은 시 풀과 양들의 세계사 풀이 사관이다 사초(史草)니까 역사의 주인은 풀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굳건한 성채인들 풀이 정복하지 않은 성이 없다 풀은 국경선을 뒤흔들고 넘나든다 풀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인가 풀이야마롤 사마천 뿌리를 뽑는다 한들 궁형의 치욕이 ..
-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유홍준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2. 1. 20:31
표제시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대나무 우듬지가 요렇게 살짝 휘어져 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앉아도 휘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는 보름달 속에 들어가 있다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쫑긋하고, 날개를 다 접은 새다 몸집이 작고 검은 새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창문 앞에 앉아 나는 외톨이가 된 까닭을 생각한다 캄캄하다, 대나무 꼭대기를 거머쥐고 있던 발가락을 펴고 날아가는 새 기억하고 싶은 시 창틀 밑 하얀 운동화 생각이 많을 때마다 나는 운동화를 빠네 낙엽을 밟고 오물을 밟고 바닥 밑의 바닥을 밟고 다닌 기억들아 깨끗이 빨아놓은 운동화 뒤꿈치에는 물이 고이네 생각의 뒤꿈치에는 늘 물이 고여있네 나는 지금 맨발, 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내가 읽은 책/리뷰 2020. 12. 1. 20:08
삶은 반복적이며 영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일회성일 뿐일까? 이런 궁금증으로 시작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십년 만에 다시 읽었다. 우리의 개별적인 삶은 직선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으므로 한시적이다. 하지만 이 직선이 모여 커다란 원이 돼버린 인류의 영원성은 끝없이 반복된다. 이 영원성 속에 기억되는 것은 ‘역사’로 남지만 대부분은 존재하다가 망각되는 가벼운 삶을 살 뿐이다. 이 가벼운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이런 질문을 시작으로 네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읽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토마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든, 미..
-
책은 도끼다/ 박웅현내가 읽은 책/리뷰 2020. 11. 28. 22:00
책을 읽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독서를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 책은 많고 읽을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양서를 읽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추천이 필요하고 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한 법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자신의 딸아이에게 독서교육을 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저자는 책에다 줄을 긋고 느낌이 있는 글은 베껴놓으면서 울림을 오래도록 공유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고 한다. 이런 독서법은 권수는 적지만 한 권 한 권을 꼭꼭 씹어서 읽는 장점이 있다. 마침 나도 열권의 책을 읽는 것 보다는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자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통해서 인식을 확장하는 것과 현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6. 13:38
표제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얖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
-
천수호 :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내가 읽은 시/내가 읽은 시집 2020. 11. 25. 05:50
표제 시 거울아 거울아 1. 의자 위에 수건 한 장이 걸쳐 있다 의자는 수건에 짓눌려 있지만 그 무게를 모른다 의자를 슬쩍 빼내어도 수건은 아랑곳없이 그 자리를 지킬 듯이 고요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다 거울만 바쁜 댄스 연습실 2. 수건이 닦고 지나간 눈이며 입이며 귀가 침묵을 학습할 것처럼 저 수건이 품고 간 알몸과 맨발이 비밀을 훈련한 것처럼 젖는 것을 전수받는 오랜 습관처럼 숭고한 침묵을 주무르며 손을 닦는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3.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서 수건은 칙치하고 은밀하게 말라간다 침묵이나 비밀과도 무관한 의자 위에 수건은 단지 정물화처럼 거기 걸쳐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거울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비밀 아니 것도 비밀인 채로 흘러 나오고. 기억하고 싶은 시 병을 나눠먹는 순두..